
서울 서대문구에는 유난히 조용한 산 하나가 있다. 이름도 평범한 ‘안산’. 늘 버스 창문 너머로만 보던 그 산을, 어느 가을 아침 직접 걸어보기로 했다. 미세먼지가 잦아든 맑은 날씨, 아침 공기 속에는 살짝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걸으니 ‘안산 자락길 입구’ 표지판이 반갑게 맞아준다.
첫 느낌은 ‘정말 이게 서울 한복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고, 사람들의 발소리 대신 새소리와 낙엽 밟는 소리가 섞여 들린다. 길은 나무 데크로 깔끔하게 정비돼 있어서 걷기 편했고, 곳곳에 휠체어나 유모차를 위한 완만한 경사로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연세 지긋한 어르신부터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빛이 바닥의 낙엽 위에 반짝이며 깔리는 순간, 괜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공기가 달랐다. 도시의 매캐한 냄새 대신 흙냄새, 나무냄새가 진하게 코끝을 스쳤다.
안산 둘레길은 한 바퀴 도는 데 약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들었는데, 체감상 그리 길지 않았다. 길 자체가 워낙 부드럽고 오르막이 거의 없어서 산책하듯 걷기 좋았다. 중간중간 벤치가 놓여 있어 앉아서 쉬기에도 좋고, 나무 데크 옆에는 조그만 전망대도 있다. 거기서 바라본 풍경은 의외로 탁 트여 있었다. 인왕산이 바로 앞에, 그 뒤로 북한산 능선이 멀리 이어지고, 그 아래로는 서대문구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그 순간 ‘서울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구나’ 싶어 괜히 뭉클했다.
잠시 앉아 물을 마시며 바람을 맞았다. 옆에서는 어떤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한쪽 벤치에서는 학생 몇 명이 도시락을 나눠 먹고 있었다. 다들 바쁜 일상 속에서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 길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길을 계속 걷다 보면 곳곳에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걱정은 없다. “독립문 방면”, “서대문구청 방면” 이런 표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순환형 코스라서 시작점이 곧 끝점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을이라 그런지 단풍이 절정이었다.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질 때마다, 마치 영화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히 걷고 있었고, 길 전체가 한결같이 차분했다. 시끄럽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이 분위기 덕분에 오히려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둘레길을 거의 다 돌 무렵, 나무 사이로 비치는 석양빛이 산을 붉게 물들였다. 노을이 질 무렵의 안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빛이 나무 데크 위로 스며들며 따뜻하게 반짝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하산길에 접어들며 나는 문득 ‘이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도심 속 작은 쉼표 같은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설 수 있는 그 쉼표. 그것이 바로 안산 둘레길의 진짜 매력이었다.